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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공장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키치에 대한 투쟁

by 익독 2020. 5. 14.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이재룡 옮김. 

민음사

 

http://www.yes24.com/Product/Goods/61933303?Acode=101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들은 서로 사랑했는데도 상대방에게 하나의 지옥을 선사했다.”국내 출간 30주년 및 국내 총 판매량 100만부 달성 기념 리뉴얼 단행본 출간매해 노벨 문학상 후보 목록에 오르는 작가인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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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문학 책에 대한 리뷰와 독후감을 작성하기에 앞서 나의 호우(好友) 은택이한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나는 문학과는 사실 거리가 먼 사람이다. 다시 정정해서 말하면, 문학 책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학교 과제나 논문을 써야할 때는 문학을 자주 접하게 되는 편이다.

 

그러나 서점에 가서 나 스스로 문학 책 코너에 직접 가서 관심을 보이지는 않는다. 사람마다 관심이 가는 분야가 있고 관심이 가는 분야에만 손이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같다.

 

나의 요즘 관심사는 돈과 경제 그리고 재테크에 관한 것이라 2020년이래 경제학과 재태크 관련 도서를 많이 읽은 것 같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인문학 책은 꽤 관심을 가지고 좋아해서 읽는 편인데, 문학이라는 단어 앞에 '인'이라는 글자가 있고 없고는 나에게 책을 고르는 데 있어서 문학이라는 공간에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벽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올해 들어 나의 관심사가 너무 경제와 재테크에 치우쳐있다보니, 이전에 읽었던 문유석 판사님의 개인주의자 선언에서 나왔던 말이 생각났는데, 가끔은 조금씩 문학과 가까이하는 시간을 늘리며 나의 뇌에 "문학 근육"을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운동을 하며 근육을 키우는데, 육체보다 중요한 나의 영혼 속 문학적 사고와 문학 근육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것 아닌가?)

 

그래서 어떤 문학 책으로 나의 "문학 근육"을 키울지 고민하던 찰나, 나의 좋은 친구 은택이는 오늘 소개하게 될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나의 "문학 근육"이 커지도록 단백질을 제공했달까? ㅋㅋ 

 

서론이 길었다. 여하튼 은택이에게 그래서 너무 고맙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하여 나의 느낀점과 간단한 생각을 얘기해보고자 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

 

 

 

밀란 쿤데라가 직접 그렸다고 하는(?) 책 속 또 다른 중요한 존재 카레닌이 그려진 표지.

 

사실 이 책에서 느낀 나의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너무 어려운 책이었다. 문학을 오랫동안 멀리해서 어렵게 느껴졌던 것도 있는 것 같지만 그와 동시에 밀란 쿤데라의 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몰입도는 훌륭하나 그 자체로 어려웠던 책인 것 같기도 했다.

 

시간 순서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도 아니고 중간 중간 작가의 생각이 툭 하고 튀어나와서 흐름이 끊겨버릴 때도 있었다. 그러나 네 명의 인물 토마시, 테레자, 프란츠, 사비나의 성격 그리고 이들 사이에 얽혀 있는 인물관계와 프라하의 봄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 줄거리는 내가 책을 읽는 동안 전반적으로 훌륭한 몰입감을 선사했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차례. 총 일곱개의 챕터로 이루어져어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총 7부의 걸쳐서 토마시, 테레자, 프란츠, 사비나 이 각각 인물들의 성격과 생활 환경 및 이들 사이의 얽혀있는 인물 관계를 비롯한 밀란 쿤데라의 생각을 서술한다. 

 

차례를 보자마자 눈에 띄는 것은 당연 1부와 5부 그리고 2부와 4부의 장 제목이 같다는 것이다.

 

 

"가벼움과 무거움", "그리고 영혼과 육체".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단순히 가벼움과 무거움 그리고 영혼과 육체의 이원성으로만 나눠서 설명하는 다른 몇몇 독후감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당연히 이외에도 여러 가지 주제를 책으로부터 도출해낼 수 있으며, 이 책으로 친구들과 모임을 가져서 얘기를 나눠봤는데 모두의 생각과 관심 있어하는 부분이 모두 상이해서 내가 캐치하지 못한 부분들을 아주 흥미롭게 들을 수 있었고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이 책의 주제와 내용 그리고 작가가 전달하려하는 말은 심해와 같다고 비유하고싶다.

 

아무리 심해여도 태양빛에 비추어진 바다의 표면과 바로 그 밑의 색깔은 오안 육 색(五颜六色)이다. 그리고 깊게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깊은 바다의 아래에는 바닥이 있기 마련이며 결국 그 바닥에서 바다의 색은 하나의 색깔, 검은색이다.

 

내가 생각하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이와 같다. 겉으로 많은 주제들이 드러나고, 이를 토대로 많은 얘기가 오갈 수 있으나 내가 생각하기에 밀란 쿤데라가 이 책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로 귀결되는 것 같다.

 

그것은 바로 "키치"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자세하게 얘기하겠다.)

 

 

 

제 1부 가벼움과 무거움. 밀란 쿤데라는 니체의 영원회귀라는 사상을 가져와서 책의 문을 연다.

 

밀란 쿤데라는 이 책의 서막을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인용하며 열기 시작한다. 

 

영원회귀 사상에 대해서 간단히 말하자면 만약 우리에게 다음 생이 있다면, 다음 생에도 나는 금생(今生)과 같은 삶을 산다는 것이고 이는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이다. 즉, 나는 다음 생에 오늘 이 시간에 똑같이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대해서 독후감을 쓰고 있는다는 것이다. 

 

책에 나오듯, 우리가 겪었던 일이 무한히 반복되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되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그러나 니체의 영원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그렇기에 우리는 현재 우리 삶에 더 충실히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충실하고 행복한 삶은 영원히 반복될 것이리라.

 

그러나 밀란 쿤데라가 니체의 영원회귀를 통해서 주장하려 하는 바는 과연 이게 다일까? 

 

밀란 쿤데라가 이 책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나의 방식으로 적어 내려가 본다.

 

 

가벼움과 무거움

 

무엇이 가벼운 것이고 무엇이 무거운 것일까? 직관적으로 바로 알 수도 없고 어떤 것이 선(善)이고 악(惡)인지 나눌 수도 없다. 

 

밀란 쿤데라는 각각의 인물들을 가벼움과 무거움으로 나누어 우리에게 다가왔다. 특정 인물이 가볍다, 무겁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나 역시도 책을 읽는 초반에는 그랬다.) 막상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따라 우리는 가벼울 수도 있고 무거울 수도 있을까?

 

밀란 쿤데라는 이 책에서 1장과 5장에서 가벼움과 무거움을 두 번에 걸쳐 얘기하는데, 각각 인물들과 그 인물들의 배경과 사건으로 우리에게 가벼움과 무거움에 대해 생각하는 시사점을 던진다.

 

결론적으로 내 생각을 말하자면 인간은 한없이 가벼운 존재이지만 끊임없이 무거움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개인일 때 가벼울 수 있으나 같이 있을 때 무거워지는 (무거움을 추구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무엇이 우연이고 무엇이 운명인가? 우리의 사랑은?

토마시는 테레자와 사랑에 빠진 것에 대해 우연.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만남은 여섯 번의 우연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테레자가 일하는 술집에 토마시가 없었더라면?"

 

"토마시가 안나 카레니나를 들고 있지 않았더라면?"

 

"토마시가 테레자가 있는 동네로 가지 않았더라면?" 등등

 

우연과 운명의 경계선이 매우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이는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보통 누군가가 운명처럼 다가왔다고 말하지만, 그 속을 잘 보면 결국 우연의 연속이 점처럼 이어져 만들어진 운명을 가장한 직선이다.

 

과연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토마시가 말했듯 "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었는데..."가 머릿속에서 되뇌어진다. 

 

만약 운명이 우연의 연속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내가 접하는 모든 우연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감사하며 살아가리라고 다짐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운명이란 것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나는 특히 '사랑'에 대해서는 모두가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내가 추구하는 혹은 내가 갈망하는 '사랑'을 절대 '가벼운 존재' 혹은 '무게가 나가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나의 사랑은 ~해야 해" 라며 의미를 부여하면서 무거운 존재로 여긴다. 

 

어디까지가 우연이고 어디까지가 운명인 것일까? 나를 향한 사랑, 내가 타인에게 주는 사랑은 가벼운 것일까 무거운 것일까? 

 

 

 

 

키치(Kitch)

 

나는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어야 하는 부분이 제6부 '대장정' 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 이유는 이 파트는 이전 파트에 있었던 사비나와 프란츠에 관한 얘기가 매듭지어지는 부분이기도 하며, 밀란 쿤데라가 앞에서 작품 속 각 인물들간의 관계와 사건 속에서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를 종합적으로 함유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각 작품 속 인물들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다른 챕터와 달리 제 6부 대장정은 밀란 쿤데라의 생각이 곧바로 나오는 챕터이다.

 

더 나아가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키치'를 이해하지 않고는 밀란 쿤데라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완전히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게 내 의견이다. 물론 나 또한 이 파트가 흥미로웠지만 그만큼 어려워서 책을 다시 읽어보기도 하고 찾아보기도 했다.

 

한 사건을 예로 들며 이 장을 시작한다. 스탈린의 아들 야코프는 수용소에 '똥' 때문에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았고, 수용소를 둘러싼 고압 철조망으로 몸을 내던지며 사망한다. 스탈린은 그 당시 소련 공산주의 체제 속 '신'과 같았으며 그의 아들인 야코프는 '신의 아들'이다. 

 

현대에서 해석되는 이 키치라는 말은 '저속한 작품, 예술적 가치가 떨어지는 작품'이라고 한다. 그러나 '똥' 사건을 통해 밀란 쿤데라가 말하는 키치는 인간이 지닌 것 중 본질적으로 수락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한 것이라고 하며 한마디로 "똥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라고 얘기하며 시작한다. 

 

키치는 똥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라는 것은 가벼움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다. 

 

신이라는 존재는 매우 무거운 반면, 똥이라는 존재는 한없이 가볍다. 

 

신의 아들인 야코프는 무거운 반면, 신의 아들인 야코프가 싼 똥은 한없이 가볍기에 이 두 개의 존재가 서로 가까워지면서 섞이면 '존재'에 대한 세계가 무의미해진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 398

 

신의 아들이 똥 때문에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인간 존재는 그 의미를 잃고 참을 수 없는 가벼움 그 자체가 될 것이며, 그렇기에 스탈린의 아들 야코프가 자신의 몸을 던지며 죽은 것은 이 의미가 사라진 세계의 무한한 가벼움 때문에 한심하게 치솟은 천칭 접시 위에 자기 몸을 올려놓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몸을 천칭 접시 위에 올리는 것을 밀란 쿤데라는 전쟁이라는 광범위한 바보짓 중 유일한 형이상학적 죽음이라고 말했다.

 

다시 강조하면 키치는 "똥(가벼움)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다. 이를 바꿔 말하면 "아름다움(무거움)에 대한 절대적 긍정" 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름다움(무거움)에 대한 절대적 긍정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뭘까? 

 

나는 이 문장이 밀란 쿤데라가 전하고자 하는 전반적 내용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시사점일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인간은 살아있는 한 키치적일 수밖에 없다. 가벼운 것에 대해서 부정한다. 내가 본질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기에, 바꿔말하면 아름다운 것, 즉 무거운 것에 대해 긍정한다.

 

이 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인간은 살아있는한 무거움, 가치를 추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가벼움과 무거움, 육체와 영혼, 존재와 망각 사이에 있는 그 무엇은 바로 키치이다.

 

밀란 쿤데라가 말하길, 키치란 존재와 망각 사이에 있는 환승역이라고 한다.

 

인간은 살아있는한 키치적일 수 밖에 없고 즉, 인간은 살아있는 한 무거움 그리고 가치를 끊임없이 추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죽으면서 더 이상 무거움, 가치를 추구할 수 없게 되고 즉, 아름다운 것에 대한 절대적 긍정(키치)으로부터 벗어난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키치를 벗어날 수 있을까?

 

인간은 죽으면서 내부적 그리고 외부적 키치와 멀어지지만, 다시 '묘비'라는 키치를 통해 돌아온다. 우리는 죽어서도 묘비라는 어떠한 핵심적 이미지로 돌아와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 (토마시와 테레자 또한 죽었지만, 키치로 돌아오듯)

 

즉 내가 생각하기에 인간은 키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왜냐하면 키치는 가벼움과 무거움, 육체와 영혼, 존재와 망각 사이에 있는 환승역이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잊히지 않는 한 키치로 돌아올 것이다.

 

왜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첫 장을 니체의 영원회귀로 시작하며 말문을 열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인간은 끊임없이 무거움과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이기에 키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키치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말은 다시 말해 우리의 행동에 "의미"가 부여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밀란 쿤데라가 말했듯, 인간은 의미를 찾고 갈망하기를 원하고 정말로 무의미를 간직한 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많이 없다고 한다. 끊임없이 어떤 것을 통해서 의미를 추구하고 무거운 것을 찾는 것이 우리의 존재의 이유이다.

 

그는 미리 책의 1부 가벼움과 무거움에서 

 

"우리 생각에는 인간을 위대하게 하는 것은, 아틀라스가 어깨에 하늘을 지고 있듯 인간도 자신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베토벤의 영웅은 형이상학적인 무게를 들어 올리는 역도 선수다."라고 말했다.

 

우리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은 즉, 인간의 존재 이유인 가치를 항상 추구하며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운명인 것.

 

그러므로 밀란 쿤데라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가져와서 작품의 문을 연 것은 "우리에게 의미를 갈구하며 살아가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그가 말했듯 이 '우스꽝스러운' 사상을 역설적으로 가져온 것이 아닐까?라고 조심스레 생각해본다.